안티누스와 황제

센스 / / 2018. 12. 8. 10:36

고대 로마  조각상 안티누스(Antinous)


그리스 신화는 참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도 신화 못지않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어 재미있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조각상들도 많은데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티누스가 살았던 시대


안티누스의 탄생을 고대 로마시대 AD 111 년에 추정되고 있습니다.


안티누스는 소아시아 비튜아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터키 북서부 지역의 로마 비티니아 지방에 위치한 클라우디오 폴리스시라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안티누스의 조각상



조각상의 외모와 안티누스가 살았다고 하는 지역을 살펴보면 그리스계라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예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지만 신분상 노예를 신격화하기는 어려운 사회였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티누스가 죽은 이후 수많은 그의 흉상과 전신상, 메달과, 화폐가 만들어지고, 별자리까지 가지게 된 과정에는 그의 연인이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있습니다.


안티누스의 공식 사인으로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물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집트 지방에서는 나일강에서 악어에 물려 죽으면 신이 된다는 신앙을 토대로 황제는 나일강가 도시(안티노폴리스)와 신전을 세우고 안티누스 종교까지 퍼트립니다.


로마 주화를 주조할 수 있는 황제는 안타까운 연인이었던 안티누스를 자신의 권위에 맞게 신격화시키는 작업까지도 과감하게 수행합니다.



지금은 국제 표준 별자리를 만들면서 안티누스의 별자리는 없어졌습니다. 적도 부근에 있는 은하계 안쪽에 놓인 별자리 독수리자리(Aquila)로 여름 저녁 하늘에 볼 수 있는 자리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별자리에서는 은하수 건너편의 직녀성과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밝은 별이어서 견우성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독수리 자리의 세 별은 직녀와 함께 견우에 속하는 별자리입니다. 동아시아에서 견우 별자리라고는 하지 않는 것과 안티누스 별자리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티누스의 연인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로 보아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였을 시기에는 고대 로마시대의 원로원은 순수한 자문 기구였지만 집단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재정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제 14대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는 76년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아(현재의 에스파냐)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고대 로마를 전성기로 이끈 다섯 황제(오현제) 중 3번째 황제입니다.


먼 친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견인이 된 후 로마에 거주지를 옮기고 로마 제국에서 군, 민생, 정치, 법 등의 요직을 두루 밟으며 로마 제국의 전반적인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황제가 될 수 있는 과정을 익혀나갑니다.


로마 제국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트리야누스 황제가 죽기 전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지명합니다. 트리야누스 황제가 사망 후  시리아에있던 하드리아누스는 41세로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히드리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 초기부터 원로원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업적으로 로마 제국 전체의 통합과 평준화, 관료 제도, 행정 제도, 법, 군, 건축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개혁합니다.


세 차례에 걸친 장기간 순찰 여행도 하게 되는데, 이 여행 과정 중에 히드리아누스 황제는 123년 48세에 클라우디오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안티누스 14세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는 특출한 자들을 로마에 보내 로마 제국식 교육을 받게 했는데, 안티누스는 사냥에 능했다고도 하고 황제의 동성애를 알고 추천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125년 제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옵니다. 1년 후 17세가 된 안티누스를 총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7년부터 황제는 제국 순방에 안티누스를 동행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누스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안티누스의 죽음


하드리아누스 황제 54세 130년 여름 오시리스 축제 기간에 아이깁투스(이집트) 나일강에서 안티누스는 익사하게 됩니다. 안티누스의 생일이 11월이라고 하면 채 19세가 되기 전입니다. 이들의 관계가 지속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고대 로마를 일으킨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실용정치를 펼쳤고 업적 또한 남다르지만 과시하기 좋아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연인의 죽음을 듣고 여자처럼 흐느껴 울었다는 이야기는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아냥섞인 조롱을 들었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성인의 동성 연애는 금기였습니다. 안티누스가 죽은 나이가 성인을 앞두고 있는 나이여서 의혹을 남기기 충분합니다.


안티누스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살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설에서는 델파에서 하드리누스에게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황제가 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안티누스가 하드리누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안티누스라는 알아 자신을 희생했다는 설과 황제의 부하들이(안티누스의 죽음이 항해 중에 일어난 것이라 인간제물이 되었다는 의혹) 안티누스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드리누스가 지시했든, 황제의 부하가 죽였든, 안티누스가 선택했든 안티누스의 죽음의 배경에는 하드리누스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히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티누스가 죽은 후 실의에 빠졌다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별장에서 은둔했다고 합니다. 안티누스가 죽은지 4년 후에 완공된 황제의 별장은 그의 별장이 극장과 목욕탕 시설 등 온갖 향락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히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티누스가 죽은 후 8년을 더 살고 62세의 나이 138년에 별장에서 서거하게 됩니다.



히드리아누스가 안티누스의 도시에 안티누스를 믿는 오시리스 안티누스 컬트의 중심지가 되어 히드리아누스가 죽은 이후 100년까지도 종교를 유지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가 힘을 얻고 난 뒤 안티누스의 도시와 종교, 예술적인 조각상들은 파괴되고 땅에 묻히게 됩니다. 동성연애에 대한 혐오감이 안티누스를 없애게 된 것입니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